감기나 독감 등 염증이 있는 상태에서 마시는 술이 왜 평소보다 간에 더 치명적인지 그 구체적인 원인이 밝혀졌다. 단순히 술의 독성 때문이 아니라, 알코올이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을 오작동시켜 간세포를 스스로 죽게 만든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과 이상준 교수팀은 서울대 라젠드라 카르키 교수팀, 호주국립대 시밍만 교수팀과 공동연구를 통해 알코올이 간 질환을 악화시키는 분자 기전을 규명했다고 16일 밝혔다.
염증 물질과 알코올의 위험한 만남, 'Z-RNA' 폭발
연구의 핵심은 바이러스나 세균에 감염되었을 때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면역 물질인 인터페론(Interferon)과 알코올의 상호작용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몸 안에 염증이 있어 인터페론이 분비된 상태에서 알코올이 유입되면 세포 내에 비정상적인 리보핵산인 'Z-RNA'가 급격히 증가한다. 원래 건강한 세포는 'ADAR1'이라는 단백질을 통해 이 Z-RNA가 면역 시스템에 걸리지 않도록 통제하지만, 알코올은 이 방어막(ADAR1)의 생성까지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통제를 벗어난 Z-RNA가 늘어나면, 우리 몸의 면역 센서인 'ZBP1 단백질'이 이를 감지하고 간세포에게 사멸 명령을 내리게 된다. 즉, 알코올이 면역 체계를 자극해 간세포를 스스로 죽게 만드는 '오작동'을 일으키는 셈이다.
동물 실험으로 입증..."ZBP1 억제 시 간 손상 급감"
연구팀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동물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Z-RNA를 감지하는 ZBP1 단백질을 억제한 쥐의 경우, 알코올과 인터페론이 동시에 존재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간세포 사멸과 간 손상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알코올성 간염이나 자가 면역 질환처럼 인터페론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는 환자들에게 술이 왜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결과다.
새로운 간 질환 치료제 개발의 토대 마련
이번 연구는 기존의 상식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은 술의 화학적 독성이 간세포를 직접 파괴하는 것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이번 연구를 통해 '알코올에 의한 면역 반응'이 간 손상의 핵심 경로임을 새롭게 밝혀냈기 때문이다.
이상준 UNIST 교수는 "알코올이 촉발한 면역 반응이 간세포 사멸을 일으키는 또 다른 중요한 기전임을 확인했다"며 "향후 ZBP1의 작용을 조절하는 방식 등으로 새로운 알코올성 간 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저명한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게재되었으며, 한국연구재단과 기초과학연구원 등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다.
[핵심 용어 설명]
인터페론(인터페론):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 시 분비되는 면역 조절 물질.
Z-RNA: 비정상적인 형태의 리보핵산으로, 세포 내에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신호로 작용함.
ZBP1 단백질: 세포 내 Z-RNA를 감지하여 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면역 센서.ADAR1 단백질: Z-RNA를 변형시켜 면역 센서가 인식하지 못하게 조절하는 보호 단백질.
왼쪽부터 UNIST 이상준 교수, 오수현 연구원, 유경주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