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치료의 핵심 약물인 표적항암제 '트라스투주맙(제품명 허셉틴 등)' 투여 시, 심각한 심장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가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발견됐다.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박준빈·혈액종양내과 고영일 교수팀(류강표 박사)과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박찬순 교수팀은 클론성 조혈증(CHIP)을 동반한 유방암 환자가 트라스투주맙을 투여받을 경우, 심부전 등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현저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17일 밝혔다.
트라스투주맙의 숙제 '심독성', 예측 지표 찾았다
트라스투주맙은 HER2(인간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2형) 양성 유방암 환자에게 필수적인 표적항암제다. 그러나 투여 환자 중 일부에서 좌심실 수축 기능 저하나 심부전 같은 '심독성(Cardiotoxicity)'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동안 어떤 환자에게 이런 부작용이 나타날지 예측할 수 있는 지표가 부족해 의료 현장에서는 고심이 깊었다.
연구팀은 최근 학계에서 새로운 심혈관질환 위험 인자로 주목받고 있는 '클론성 조혈증(CHIP)'에 주목했다. CHIP은 혈액을 만드는 조혈모세포에 후천적 돌연변이가 생긴 상태로,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높아지며 암이나 심혈관질환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국내외 대규모 데이터 분석... 위험도 최대 4.57배
연구팀은 영국 바이오뱅크(UK Biobank)에 등록된 유방암 환자 1만5729명의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CHIP을 보유한 상태에서 트라스투주맙을 투여받은 환자군은 CHIP이 없고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심부전 발생 위험이 4.57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국내 환자 표본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됐다. 서울대병원에서 트라스투주맙 치료를 받은 유방암 환자 454명을 정밀 분석한 결과, CHIP을 동반한 환자군에서 심장 기능 저하 및 심부전 등 심독성 부작용 발생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맞춤형 항암 전략 수립의 전환점이번 연구는 항암 치료 시작 전, 간단한 혈액 검사 등을 통해 CHIP 유무를 확인함으로써 심장 부작용 고위험군을 선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박준빈 서울대병원 교수는 "트라스투주맙은 유방암 생존율을 높이는 필수 약물이지만, 개별 환자의 심독성 위험을 정밀하게 예측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번 연구를 통해 클론성 조혈증이 환자별 맞춤형 심독성 위험 예측을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연구 성과는 종양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미국의사협회 종양학회지(JAMA Oncology)' 최신호 온라인판에 게재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용어 설명]
트라스투주맙: HER2 양성 유방암 및 위암에 사용하는 표적항암제.
클론성 조혈증(CHIP): 조혈모세포에 돌연변이가 생겨 특정 혈액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하는 상태. 노화와 관련이 깊으며 심혈관질환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