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공동 연구팀이 오늘 과학 저널 사이언스(Science)를 통해 암세포가 항산화 효소 '퍼옥시레독신1(PRDX1)'을 이용해 면역 T세포의 핵심 무기인 '활성산소종(ROS)'을 제거함으로써 면역항암제 내성을 유발한다는 획기적인 사실을 밝히며, 새로운 치료 표적의 등장을 알렸다.
면역항암제는 21세기 암 치료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적인 치료법으로 평가받는다. MSD의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 등으로 대표되는 면역관문 억제제는 인체의 면역 체계를 활성화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많은 암 환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수 환자는 면역항암제에 반응하지 않거나 치료 도중 내성이 생겨 좌절을 겪는다. 이 '내성'이라는 난제는 면역항암제 시대의 가장 큰 숙제로 남아 있었다.
오늘 발표된 케임브리지대 라훌 로이추드후리 교수와 오리건 보건과학대 로버트 L. 아일 교수가 이끈 공동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이 난제를 풀 중요한 단서를 제시했다. 연구팀은 암세포가 면역 체계, 특히 T세포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상상 이상의 '교묘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암세포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종양 미세 환경에 항산화 효소 PRDX1을 분비해 T세포의 활성화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T세포 활성화에 '활성산소종(ROS)'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체내에 과도하게 축적될 경우 세포 손상과 노화를 유발하는 유해 물질로 알려진 ROS는 면역 T세포가 암세포를 인식하고 공격 명령을 받을 때, 소량을 만들어 수용체 신호전달을 통해 스스로를 활성화하는 '필수적인 무기'로 작용한다. 이는 항산화제가 암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는 대목이다.
암세포는 이러한 T세포의 '비밀 무기'를 역이용하는 전략을 취한다. 암세포는 항산화 효소인 PRDX1을 종양 환경으로 분비하는데, 이 PRDX1은 T세포 활성화에 필요한 ROS 중 '과산화수소'를 선택적으로 제거한다. T세포는 ROS가 부족해지면 활성화되지 못하고, 증식 능력과 암세포를 죽이는 효과기 기능까지 억제되어 결국 암 공격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암세포가 T세포의 무기를 빼앗아 무력화시키는 정교한 기전이 밝혀진 것이다.
연구팀은 전임상 실험을 통해 이 기전의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로 PRDX1을 만들지 못하게 조작한 암세포를 이용한 생쥐 흑색종 실험에서, 종양 성장이 크게 억제되거나 면역 체계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는 현상이 관찰됐다. 특히 면역관문 차단 치료(항PD-1·항CTLA-4)에 전혀 반응하지 않던 생쥐 흑색종이 PRDX1 제거 후에는 치료에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결과는 면역항암제 내성 극복의 직접적인 희망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생쥐 간세포암 모델에서도 PRDX1 제거 시 면역관문 차단 치료 효과가 더욱 강화되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생쥐 모델을 넘어 인간 암에서도 그 확장성을 입증했다. 연구팀이 사람의 11개 암종에서 유래한 23개 암세포주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모델에서 PRDX1이 다른 항산화 단백질보다 가장 풍부하게 존재했다. 이는 PRDX1이 인간 암에서도 면역 회피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유사한 기전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번 발견에 대해 케임브리지대 라훌 로이추드후리 교수는 「암이 면역체계를 차단하는 새로운 경로를 발견했다」며 「이 경로가 암 치료 표적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리건 보건과학대 로버트 L. 아일 교수 역시 「많은 암이 면역요법에 반응하지 않거나 치료에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이 연구 결과가 특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비록 전임상 단계이지만, 면역항암제 내성의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새로운 치료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약·보건 분야에 엄청난 파급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종양 내 PRDX1을 선택적으로 표적하거나, 종양 미세 환경의 ROS 농도를 높이는 혁신적인 치료법 개발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궁극적으로 현재 면역항암제에 반응하지 않는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고, '개인 맞춤형 면역항암 치료'의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의약일보는 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과 임상 적용 가능성에 대해 면밀히 추적 보도할 것이다.
